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섹슈얼리티 === 젊은 시절부터 [[색정광]] 명성으로 견줄 자가 없었다. 현대 사학자들은 리처드가 헤도니스트, 변덕스러운 [[색골]], [[성충동]] 괴물이라고 말한다. * 뉴버그의 윌리엄은 리처드 1세의 여성 편력을 증언하고 기스버러의 월터는 "단 하루도 여자 없이 못 살았다. 그는 임종 전에도 [[매춘부]] 네 명과 있었다"라고 적었다. 부르봉의 스테판에 따르면 "왕이 퐁트브로의 수녀에게 잠자리에 응하지 않으면 수도원을 불태우겠다고 협박하자 수녀가 제 눈을 뽑아 왕에게 보냈다"라고 하는데, 앨리슨 위어는 이 기록은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그 시대 사람들에게 퍼진 리처드 1세의 이미지를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 또한 앨리슨 위어는 리처드 1세가 3차 십자군 원정에서 포로로 잡은 키프로스 군주 이사키오스의 딸에게 음흉한 짓을 했다고 추정한다. 리처드 왕의 편력기의 작가는 딸이 아직 어린애에 불과했다고 회상한다. * 여기에 연장선인지 [[https://www.cs.mcgill.ca/~rwest/wikispeedia/wpcd/wp/r/Richard_I_of_England.htm|전투 후 사로잡은 여인들을 겁탈하고 몇은 첩으로 삼거나 몇은 휘하 기사들에게 넘겼다고 한다.]] 양성애자 의혹이 있다. 상위 주군이자 절세 미남이었던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일설에 따르면 그 [[헨리 2세]]가 왕세자 시절의 필리프 2세를 보고는 충격에 휩싸여 "애절하게 바라보다가 갑자기 서둘러 가버려 구경꾼들을 대단히 놀라게 했다"라고 한다. 참고로 필리프 2세의 친여동생 [[프랑스의 아녜스|아녜스]]도 절세미녀였는데 동로마에서 서유럽 최고의 아름다움 중 하나로 불렸다.] 동성 연인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이 의혹은 '''학계에서 결코 다수의 지지를 받지 않는다.''' * 호버든의 로저는 1187년 리처드가 잉글랜드의 왕자였을 때 필리프 2세와 같은 침대에서 잤다고 기록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긴장 상태에서 리처드가 부왕과의 정치적 불화로 인해 필리프 2세로의 동맹 정책으로 변경했던 시점이었다. 이 기록은 두 권력자의 관계[* 우정 및 동맹]을 긍정적으로 판단한 어조로 서술되었다. 존 길링엄은 '당시 침대를 나누는 행위는 정치적 동맹의 표명'이고 둘의 행위는 '정치적 이해를 위한 동맹의 과시'라고 분석하여 리처드의 성적 성향에 관한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헨리 2세]]와 형인 [[청년왕 헨리|젊은 왕]]도 '서로에 대한 의심을 지우기 위해' 같은 침대에서 잔 적이 있었다. * 호버든의 로저는 리처드가 십자군에서 시칠리아에서 체류했을 때 1190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모든 성직자들을 불러 놓고 '자연을 거스른 죄'를 다시는 범하지 않겠다고 참회했던 것을 칭찬했다. 이 죄는 동성 성관계만이 아니라 총체적인 성적인 죄로 이해된다. * 호버든의 로저는 1195년 리처드가 "[[소돔]]의 멸망을 기억하여 불법적인 성교를 삼가라"라는 경계를 들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소돔은 '임신을 만들지 않는 성행위'를 의미했다. 동성 성관계만이 아니라 동성 성관계를 포함하는 성적인 죄였다. C. 재거는 이 기록을 (1)의 기록과 대조시켜 호버든이 기록한 1187년 잉글랜드의 왕자 시절의 리처드와 필리프의 관계는 소돔이 아니었음을 밝혀냈다. 만약 두 권력자의 관계가 소돔이었다면 호버든의 어조는 부정적으로 판단한 어조로 서술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존 볼드윈 교수도 이에 동의한다. 다시 말하여 '''1187년 리처드와 필리프의 관계는 소돔∋동성 성관계가 아니'''었다. 리처드 1세에 대해 가장 권위있는 평전을 집필한 존 길링엄은 상단의 근거로 리처드와 필리프 2세가 동성 연인이었을 것이란 주장에 회의적이며 리처드를 이성애자로 본다. 중세사 교수 진 플로리는 리처드를 양성애자로 판단하지만 필리프 2세와 동성 연인까진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반면 필리프 2세에 대해 가장 권위 있는 평전을 집필한 존 볼드윈은 필리프 2세의 생애 동안 성관계 상대가 최소 몇 명인지에 주목하여 두 번째 상대를 1189~90년 리처드 1세로 제시했다.[* John Baldwin, ‘The Many Loves of Philip Augustus’, in The Medieval Marriage Scene: Prudence, Passion, Policy, eds Sherry Roush and Cristelle L. Baskins (2005), 68-72. 첫 상대는 1180년 첫 왕비 이사벨 드 에노, 두 번째 상대는 리처드 1세, 뒤이어 세 번째 상대는 1193년 아미앵에서 첫날밤을 나눈 잉에보어로 제시하고, 필리프 2세의 잉에보어와의 첫날밤 반응을 원인을 알 수 없는 급성 섹슈얼 트라우마 발현으로 해석했다.] 그렇다고 형제들 중에서 처음부터 필리프 2세와 가장 절친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들이 본격적으로 우정을 형성한 건 청년왕 헨리와 [[제프리 2세]]가 죽고 나서야 리처드만이 아니라 필리프 2세 입장에서도 정치적 이해가 다분히 발생할 때였다. 다만 리처드가 메시나에서 체류했을 때 그 성정에 재력과 권위에도 불구하고 필리프 2세의 무리한 요구를 따르고 상위 주군 대접을 꼬박꼬박 해준 걸 생각하면 리처드는 우정을 진심으로 여기는 걸 넘어 흠뻑 심취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상대가 신의를 지키는 건 그 자신에게 이로울 때뿐이었다. 하지만 십자군에서 사이가 나빠진 뒤에 리처드는 신임하던 여론 관리자인 베르트랑 드 보른을 이용하여 필리프 2세를 추악한 언사로 공격했다. 심지어 trop mols(very soft)라고 짓궂게 놀리기도 했다.[* mols를 라틴어로 옮기면 mollis이며 당대 서유럽에서 가장 열광적으로 읽혀진 아우렐리우스 프루덴티우스 클레멘스의 고서에서 [[헤라클레스]]가 동성 애인으로 삼은 [[힐라스]]의 별명이 mollis puer였다. "mollis puer에 대한 사랑으로 악명 높은 헤라클라스의 열정은 심지어 [[아르고 호 원정|아르고 호]]가 바다에서 항해를 하고 있을 때에도 격렬하게 화를 냈고, 그가 사라졌을 때, 마치 아내를 잃어버린 것처럼, 얼굴이 시뻘개져서 [[네메아의 사자]] 가죽으로 사악함을 숨기지 않고 그를 찾아다녔다." 특히 헨리 2세의 치세 말과 리처드의 치세에 잉글랜드 암흑가에서 동성 성관계에서 수동적 역할, 즉 삽입당하는 역할을 맡는 미청년의 외모를 칭찬할 때도 쓰였다. Pietrini, Spettacolo e immaginario teatrale nel Medioevo(Roma: Bulzoni, 2001)] 십자군에서 귀환했던 뒤로는 성행위를 할 때 '''악마에 씌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당시대의 잉글랜드 사가는 리처드 1세의 측근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돌았던 소문을 거론했다. "악마가 리처드 왕과 동행하여 성지에서 귀환했다. 악마가 왕의 직속 수행원이 되었다. 그리고 악마가 종종 왕의 침실에 존재한다."[* Problemi attuali di scienza e di cultura. Accad. Naz. dei Lincei Quaderni N. 251: 4.] 참고로 리처드는 십자군에서 귀환했던 뒤로 [[미사|성체성사]]를 받지 않았던 기이한 행동에 대해 고해하기도 했다. "그동안 성체를 거부한 이유는 내 심장이 프랑스 왕을 용서할 수 없어서였다."(He confessed that he refused the sacraments for seven years because his heart could not forgive king of France.) [[미소년]]을 탐하느라 궁정을 동성애 소굴로 만들었단 지탄을 받았던 윌리엄 롱챔프와 오랜 절친이었으며 잉글랜드 내 나쁜 평판에도 굴하지 않고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섭정위원회의 중추를 맡겼던 것을 보면 최소 친분이나 인사 검증에 있어서 미소년과의 관계를 터부시한 것으로 사료되진 않는 듯하다.[* 여담으로 그의 동생 스티븐 롱챔프도 리처드의 절친이었는데 3차 십자군 군사 사령관으로 활약하였으며 그의 생전에는 의리를 지켰으나 죽은 뒤에 잉글랜드 상속지를 포기하고 부빈 전투 중 낙마하여 죽을 위기에 처한 필리프 2세를 지켜주다가 대신 전사했다. 또 다른 절친으로 모계 쪽 사촌 앤드류 쇼비니는 리처드의 용맹에 버금갔던 아르스푸 전투에서 대활약한 군사 사령관이었는데 그도 생전에는 의리를 지켰지만 죽고 몇 달 뒤 필리프 2세의 곁에서 목격되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슬하에 서자 한 명뿐이다. 1180년대 초에 미상의 여인에게 얻게 되어 이름을 필리프로 지었다.[* 영국의 대중 역사가로서 중세 영국과 프랑스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데스몬드 시워드는 리처드가 필리프 2세의 이름을 따서 서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주장한다.(출처: Eleanor of Aquitaine, 저자 Desmond Seward) 이때 필리프 2세는 왕위에 막 오른 14-15세에 불과했고 리처드는 그보다 8살 연상이었다. 게다가 필리프 2세는 리처드와 그의 형제들의 도움으로 재위 초기의 절제절명의 위기를 타개했음에도 리처드만은 언짢아하고 멀리하던 때였다.] 누나 마틸다와 하인리히 사자공의 차남인 조카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오토 4세]]가 리처드를 거푸집 마냥 빼닮았기에 친아들처럼 대하고 아키텐 공작으로 서임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